아빠의 서재/그 이후

1983이후의 시1

개구쟁이 막내딸 2024. 8. 16. 14:49

어머니

 

어머니, 오늘도

찔레꽃 흐드러진 뒷산 언덕에

아침햇살로 내리시고

구멍 난 내복바람으로 온 마을을 휘젓는 막내의 뒷덜미에

돛단배를 얹으시다

돌밭의 지심을 매고 계시는지요

흙 묻은 그 손길로

이마의 땀을 닦고 계시는지요

어머니, 새벽마다

마당 어귀 감나무 밑

정안수 한 그릇 보여요

한 번도 무너지지 않은 나무 울타리

당신의 평화로운 성벽이 보여요

어머니, 저녁마다

반딧불 호박꽃 초롱 제 창에 걸려

모깃불 연기 흐르는 뜰 멍석에서

찢어진 부채로 막내를 재우시는

어머님을 비춰요

 

어머니, 추적추적 비가 오네요

기억나세요, 그 해 5월

느닷없이 소식이 끊겨버린 형이

황토 흙 조그만 집을 지어 돌아오고

전에 없이 계속되던 장마비 속 논두렁에서

우리 집 비맞은 장닭 콜록거리다 쓰러져도

말없이 제 손만 꼬옥 쥐셨잖아요

어머니,

자정이 넘어도 아직 잠들지 못하지만

내일은

등잔불에 쇠기름 녹여 바르시던

까칠하신 당신 손을

꼬옥 잡아드리겠어요, 어머니. (1984. 7)

 


1984년 9월 어느 날 해질녘 소나기

 

교문에선 대일 굴욕외교 결사반대 구호소리

운동장에선 축제의 고함소리

강의실에선 수업받는 불안한 가슴들

낯설어진 땅 위에 한참이나 서 있다

고개를 떨구고 돌아서는 사내를 보고

더러는 치장을 위하여

더러는 변명을 위하여

더러는 침묵을 위하여

많이는 초점없는 눈망울로 그냥 들여다보던

금이 간 거울 하나 슬그머니 일어선다

 

남루를 예쁜 목걸이로 달고 다니던 누이야

그 여름 네가 소식도 없이 빈 젖가슴으로 돌아온 이후

기다림을 내던진 아이들

오늘도 눈자위가 붉게 물들도록 재채기를 하고

목이 쉬고 손발이 부르트더라

양지 바른 장독대에서 봉숭아 꽃물 들일 세월이

풍문에는 더디 올 거라더라만 누이야

시계침이 오늘따라 빨리 돌더라

 

연구실 전화벨이 자주 울리고

유리병에 꽂힌 국화 한 아름 향기 가더니

교정 플라타너스 잎에 덮인 최루가스

1984년 9월 어느 해질녘 소나기가

씻어 내고 있다. (1984. 9)

 


변명

 

실없는 웃음만 연방 흘리다가 나는

칼날이 되어 내 살에 꽂히는

너희들의 눈빛을 맞는다

 

비오는 날 선술집 바닥에 깔리는 너희들의 당당한 목소리

최루가스 속을 헤집고 튀어 오르는 너희들의 두 주먹

담배연기 자욱한 자취방 가득히 넘쳐흐르는 너희들의 땀냄새

때 묻은 책갈피마다 묻어 나오는 너희들의 붉은 피

 

너희들은 자신에 넘치고

너희들은 단언하고

너희들은 승리한다

죽음이거나 삶이거나 너희 앞에서

쓸데없이 서성이지 않는다

 

  - 지금, 이 땅에서 우리

  일하고 있습니다, 형님

  그 뿐

  허깨비를 보지 마십시오

 

허리춤에 감춘 몇 줌의 쌀

양복을 입고 굽신거리는 내 아랫도리를 타고 흘러내리며

어젯밤도 가위눌린 아내의 가슴

기다릴 필요도 없는 하늘 위에 다시 올린다 그러나

아내야, 이제

감추어야 할 아무 것도 남기지 말고 알몸으로 우리

아우들 핏자국 마르기 전에

펄럭이는 깃발 뽑히기 전에

갈라지고 갈라진 이 땅 틈마다로 굴러 들어가

끈끈한 피를 쏟아 내자

끊어지지 않는 다리가 되자

파 낼 수 없는 흙이 되자, 그리하여

풀냄새 들꽃 향기 가득한 꽃밭

막힌 데 없어

너 나 없이 어울어져 일구는 아우들의 땅, 우리들의 땅이 되자. (1985. 6)

 

 


교단일기 I

 

밥이 우리를 잠들게 하므로

밥 때까지 참을 수 없어

앞서서 먹어 치워야 한다는 아이들아

오늘도 네 형들은

온 몸에 불을 붙여

이 땅에 다시 살아

두 주먹 불끈 쥐고 있고

희멀건 공순이의 몇 푼보다

휘황찬란한 밤거리의 벌건 몸값이

밥벌이에 더 낫더라는 네 누이는

엊저녁도 머리칼을 한웅큼 뽑아내고 있더라

잊어도 되고

몰라야 하는 얼굴들이

깊게 팬 이마의 주름 사이로 스멀스멀 기어들어

지심을 매는 어머니의 다문 입술에서 말이 되어

뚝뚝 떨어지고

북간도로 쫒겨 간 네 삼촌이

휴전선 지뢰밭에서 발목이 잘린 채 신음하고 있다고

쟁기를 내던지고 뛰쳐나간 아버지

장터에서 때려죽인 쇠뼈만 들쳐 매고

하염없이 떠돌고 있더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아무 것도 모른 채 거짓만 익히고 있는 아이들아

그래, 너희는

참지 말고

미리 먹어 치워라, 먹고는

잠들지 말고 두 눈 부릅뜨거라

네 형의 살타는 냄새 모두 다 들이마시고

네 누이의 선연한 핏자국 빠짐없이 가슴에 새겨두고

네 부모의 피눈물 땀방울 일일이 받아 마시며

살아서 튀어 오르는 말이 되거라

앞서서 내딛는 발자국

막힌 것을 뚫는 돌멩이가 되거라

뒷걸음질치는 우리의 발 뒤에 모닥불을 지피고

진달래 지천으로 피어 있는 한라에서

곧게 뻗은 소나무 하늘 뚫어 단비 내리는 백두까지

손에 손 맞잡고 마구 내달려라, 아이들아.(1986. 10)

 

 


교단일기 II

 

아무 잘못도 없으면서 흘깃거리며

교무실을 들어서는 아이야

겨울이 되기 전에 움츠리는데 익숙해져

운동장에서도 뒷전에 움츠리고 앉은 내 아이야

너는 무엇을 두려워 하느냐

성적이 나쁘고

납부금도 겨우 내는 게

대학입학이 목표라는 인문고등학교에 다니면서

학력고사 원서를 쓸 수 없는 게

친구마다 너를 무시하고

선생님마저 네게 관심이 없는

텅 빈 교실

이글거리는 분노의 눈빛으로 뛰쳐나간 게

네가 아는

어쩌면 모두가 말하는 네 잘못이냐

가게 앞 그득 쌓인 배추포기만 한없이 들여다 보다

불기 없는 자취방에 돌아 와 맨밥을 먹으며

못배운 죄로 땅만 파신다는 부모님

나이보다 배나 늙어버린 부모님 얼굴 떠올라

얼굴을 파묻고 엉엉 우는 내 아이야

아니다 아니다 그런 건 전부 네

잘못이 아니다

 

성적, 납부금, 대학 그 어떤 것도

네 눈물 한 방울보단 못하다 그러나

잘못도 없이 흘깃거리는 게

뒷전에 움츠리고 앉은 게

네 잘못이다

가슴 속에 이글거리는 너의 불꽃을 잠재우려는 못남이

뜨거운 네 눈물 남몰래 흘리는 게

네 잘못이다

 

똑바로 바라 보거라

당당하거라

너는 튼튼한 두 팔과 발, 뜨거운 가슴이 있지 않느냐

네 가슴의 이글거리는 불꽃이 있지 않느냐

잘못된 눈길, 어리석은 손길들을 용납하지 마라

그 어떤 두려움 앞에서도

자랑스런 네 몸과 가슴으로

당당하게 이 땅을 딛고 서거라

그리하여

이 땅의 모든 거짓 쫒아내고

모두가 함께 어울어지는 우리들의 잔칫날

넉넉한 그 가슴 드러내며 빙긋이 웃어 보자, 내 아이야. (1986. 11. 호남교육신문 기고)

 

 


교단일기 III

 

우리 부모들은 가난을 극복할 의지와 각성이 부족했다고

질겅질겅 껌을 씹으며 외우고 있는 아이야

네가 교과서에 적힌대로 내뱉고 있듯, 그래

우리는 가난을 벗삼아 살아 왔단다

우리의 선연한 피를 뽑아가고 뽑아가도

말없이 살아 왔단다

그러나 내 아이야

모진 목숨 지금껏 이어 오고 있는 이것이

무얼 뜻하는지 너는 아느냐

몸뚱어리 하나로 쓰러질 듯 버티어 온 이것이

무얼 뜻하는지 너는 아느냐

 

키우지도 못할 새끼들만 많이 낳았다고

요즘 너희들은 흥부를 비난하더라만

생각해 봐라,

맨몸뿐인 우리가 싸워 이기는 길은

죽여도 죽여도 끝없이 살아 있는 우리들 맨살이란다

더러는 죽창도 들고, 쇠스랑도 들어 보았다만

보이지 않는 총알들은 우리의 가슴을 뚫고

잡히지 않는 돈들은 우리의 목을 조이더라

가난이 복이 아님을 우리의 맨살에 와 닿는 이

겨울바람으로 우리가 알 듯, 내 아이야

가난을 이겨내는 길도

질기고 모진 목숨 잇고 이어

맨살로 부대끼는 사람들끼리 한 덩어리로

피흘리며 굴러 가는 것임을

소들을 몰고 군청으로 달려가며 배우지 않았느냐

속지마라 내 핏덩이인 내 아이야

가난이 무엇인지 눈꼽만큼도 모르는 놈들 앞에

그 거짓말을 찢어 발겨라

그 희멀건 낯짝에다 네가

씹고 있는 그 질긴 껌을 뱉어 줘라

내 아이야. (19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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