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리한 인간의 반항과 죽음
- A. Camus의 「Les Justes」를 중심으로
一. 서론
인간은 역사 이래로 부당한 고통을 받아 오고 있다. 또한 그 고통을 때로는 묵인하고, 때로는 부당한 것으로 여기고 반항한다. 더구나 20세기에 이르러서는 억압은 더욱 다양해졌고, 그동안 인간을 지탱해 오던 제반 가치가 점차 붕괴함으로써 인간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 어디에나 죽음은 산재해 있고, 살인과 불의가 넘쳐 있으며, 인간은 각종 이념과 물질의 도구가 되어가고 있다. 점점 인간의 참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어 지고 있다. 그리하여 헤르만 그라사(Herman Glaser)는 “지금은 자유이념이 문제가 아니라 집단수용소에서의 노예화가 문제되고, 영원한 사랑이 문제가 아니라 교외 술집에서의 성관계가 문제이며, 신과 악마와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영혼이 문제가 아니라 거리에서 횡사해 가는 가엾은 인간들이 문제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상가, 예술가, 문학자들이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을 하고 있다. 인간은 어떻게 해서든 그의 참모습, 인간성을 회복해야 될 것이며, 인간임을 주장해야 되고, 인간으로서 죽어가야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인간조건을 탐구하고 있으며, 무엇이 어떻게 인간을 파괴하여, 인간을 처참한 고통 속에 머무르게 하는가를 살펴보고, 그 대안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본고는 R. M. Albérès가 그의 「L'aventure intellectuelle du XXₑ Siécle. 1900~1959」 속에서 ‘미래를 예견하고 현재를 이해하는 바로메터는 오직 문학뿐이다.’ 라고 한 말 속에 잘 드러나 있듯이, 문학 속에서 그러한 노력을 추구했던 프랑스의 현대 작가 A. Camus를 살펴봄으로써 이 시대를 이해하고자 하며, 생존의 한 방법을 추구하고자 하는 조그마한 한 노력에 불과하다. 그리하여 본고에서는 A. Camus의 「Les Justes」라는 희곡작품을 그 사상적 측면에서 분석 검토하고자 한다.
그 방법으로 먼저 작가 A. Camus의 세계관, 즉 부조리한 인간의 세계인식을 살펴보고, 반항의 성격, 즉 그 대상, 목적, 이유, 방법과 한계를 주인공들을 분석함으로써 알아보고, 이 시대 문제의 하나인 살인, 즉 죽음의 문제를 반항인은 어떻게 수용하게 되는가를 탐구하려 한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Les Justes」의 장르적 특성과 작가의 미학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을 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것들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
니라, 본고가 추구하고자 하는 바와 직접적인 상관성이 적으리라는 판단 하에서 이다.
二. 본론
Les Justes는 1905년대를 배경으로 러시아 테러리스트들의 세계를 묘사하고 있다. 이 테러리스트들은 폭정으로 간주되는 Serge 대공(大公)의 마차에 폭탄을 던지기로 한다. 이 폭탄투척의 임무를 맡은 Kaliayev는 대공 곁에 타고 있는 대공의 두 어린 조카 때문에 처음에는 투척을 포기한다. 어린 조카들이 없는 두 번째에야 투척은 성공하며 Kaliayev는 투옥된다. 감옥에서 그는 동지를 밀고하라는 경찰국장의 제의와 크리스트의 이름으로 그를 용서하기 위해 찾아 온 대공비(大公妃)를 거절함으로써 두 번의 사면기회를 거절한다. 그리하여 그는 끝내 교수형의 길을 택하고 죽는다. 이것이 「Les Justes」의 개략적 줄거리이다. (이는 A. Camus가 1905년 러시아 무정부주의자들을 지도했던 보리스 사핀코프의 「한 테러리스트의 회고록」에 나타나 있는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에서 직접 소재를 구하여 극화했다고 한다.)
이제 A. Camus가 작품을 통해 나타내고자 했던 것을 하나씩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부조리한 인간
Kaliayev, Dora, Stepan, Annenkov, Voinov 이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무엇 때문에 테러리스트가 되었는가? 그리고 A. Camus는 왜 이들을 소재로 작품을 썼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들은 부조리한 인간들이다. 그들이 처한 시대상황 속에서, 그들은 부조리를 발견했으며, 그 부조리의 극복을 위해 반항에로 뛰어든 것이다. 그래서 절망과 부조리의 철학자요, 정오의 사상가인 A. Camus는 그들한테 무한한 애정을 느꼈으며, 절망한 이 세기를 구원할 영원한 인간애를 발견한 것이다.
그러면 부조리한 인간이란 어떤 사람인가? 그리고 부조리한 인간은 왜 반항에로 뛰어 들게 되며, 작가는 왜 반항인에게서 이 절망한 세기를 구원할 수 있는 희망을 발견하는 것일까?
R. M. Albérès는 부조리란 철학이 아니라 사회적·문학적인 감성의 상태, 각 개인이 자기와 세계와의 관계를 느끼는 방식이라고 한다. A. Camus가 “별안간 배경이 무너지는 수가 있다. 기상·전차·사무실이나 공장에서 네 시간·점심·전차, 또 네 시간의 노동·저녁·잠자리, 이리하여 같은 리듬으로 월·화·수·목·금·토, 누구나 이런 행로를 매일처럼 쉽게 따라 간다. 그러나 하루는 기어이 ‘왜?’라는 물음이 떠오르고야 마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은 놀라움이 교차된 이 권태 속에서 시작된다.”라고 썼을 때, 그것은 이 세계가 자신을 위해서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이것은 자신과 삶 사이에서 하나의 단절을, 부조리를 발견한 것을 의미한다. 낯익은 것이지만 이미 비인간화 되어버린, 사물화 되어버린 인간 행동이나 모습에서 느껴지는 구토, 즉 부조리를 발견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의 각성이 시작된 것이다. 세계와 인간의 운명에 대한 각성이. 신도 영생도 없으며, 확실한 것은 자기 주위를 둘러막은 벽, 죽음 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논리적 귀결이 아니라 Albérès의 말처럼 감성으로써 깨달은 것이다. 그런데 왜 확실한 것은 죽음 밖에 없다고 느끼는 것일까?
서론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양차 세계대전을 치룬 이 세기는, 참으로 끝 모를 심연 속에서 방향을 잃고 헤매는 절망한 인간들의 세기이다. 전 세계는 무고한 자들의 죽음 앞에서, 방심한 태도로 이 범죄를 모른 척 하고 있으며, 그들의 희생은 일상사가 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범죄가 무고의 껍질로 장식되는 시대이며, 정말 무고한 자가 무죄 변론을 제시하도록 재촉 받는 시대, 타인들 이외에는 부정하지 않는 이데올로기의 시대인 것이다. 그것은 사막이다. 있다면 허위와 타협과 비열의 세속 질서뿐이고 그 어떤 이상적 질서가 없는 세계인 것이다. 만약 신이 있다면 그의 죄 없고 착하며 성실한 피조물이 부당하게 고통 받고 죽어가는 것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리 없고, 이성이 있다면 그토록 부조리한 살육과 파괴와 억압이 행해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미를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어떤 가치도 긍정할 수 없고, 어떤 것도 믿지 않게 되는 것이다. 오직 죽음만이 확실한 것으로 존재할 뿐. 그리하여 인간은 죽음 앞에서 인간의 욕망과 현실 사이에 발생하는 괴리, 부조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인간적인 부름과 세계의 부당한 침묵이 대치하고 있는 곳에서 발생하는 부조리, 인간적인 향수와 비합리적인 것이 대치하는 곳에서 나타나는 부조리, 이는 인간 정신이나 이 세계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부조리의 본질은 인간과 세계의 끊임없는 대립이요, 투쟁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각성하는 인간, 즉 부조리한 인간은 자기의 매일을 지배하는 자가 신이 아니라 인간자신이라고 느낀다. 그는 “인간의 것은 모두 오로지 인간을 기원으로 하고 있다.”는 인간애에 바탕을 두고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 시대상황을 볼 때 당연한 귀결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A. Camus의 이러한 생각을 「독일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 세계에는 의미 있는 무엇이 있다는 것을 알았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인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 의미를 가지려고 노력하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세계는 적어도 인간이라는 진리를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부조리한 인간은 결코 충족될 수 없다는 명증한 사실인 부조리를 계속 지켜야 한다. 즉 언제나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부조리를 계속 지킨다는 것은 신이 없는 세계에서, 숙명에 끌려 인간과업을 수행하면서 자기의 조건을 받아들이는 것, 즉 인간존재의 무상성, 우주의 부조리성, 인간의 불행 등 그 모든 부조리한 것에 대한 책임을 인간에게 부과하고 스스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부조리한 인간은 그 근저에 하나의 서글픈 항의를 가지고 있는 반면 자기에게 주어진 삶-버림받은 삶-을 그대로 받아들여 미래에 대한 무관심을 길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부조리가 유지된다고 해서 부조리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산다는 것은 하나의 가치판단인데 살기를 원하면서(인간이므로) 아무 것도 믿지 않으며 모든 것은 부조리하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다. 그러므로 ‘부조리는 지나쳐 버려야 할 하나의 과정이며, 하나의 시발점’인 것이다. 그리하여 부조리한 인간은 니힐리즘으로 빠져들 것이 아니라, 누가 요구하지 않더라도 인간 자신의 운명을 다스리기 위하여 반항해야 한다고, 자진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화해하지 않고 죽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부조리하다고 외치는 그 외침만은 의심할 수 없고, 적어도 그 항의만은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에 ‘부조리의 경험 내부에서 주어진 최초이며 유일한 명증성은 반항’이며, 그것은 자살을 거부하고 부조리와의 절대적인 대결을 유지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제 왜 Kaliayev와 그의 동지들이 부조리한 인간인가는 자연히 설명이 된 셈이다. 1905년 당시의 러시아는 신이라고 불러도 좋을 황제의 폭정이 실시되고 있었다. 모든 러시아의 인민이 이 폭정 아래 신음하고 있을 때, Kaliayev를 비롯한 테러리스트들은 도무지 신도 영생도 이성도 믿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오직 확실한 죽음만을 보았을 것이며, 마침내는 죽음의 위험 속으로 뛰어듦으로써 부조리와의 절대적인 대결을 유지하려 했을 것이고, 반항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그들이 테러리스트였다는 것이 바로 그들이 부조리한 인간이요 반항인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그들의 말에서도 그들이 인간애, 인간의 연대성에 기초한 부조리한 인간들이며 반항인들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Annenkov : Nous étions contents quand nous avons appris que tu avais pu gagner la Suisse.
Stepan : La Suisse est un autre bagne, Boria.
Annenkov : Que dis-tu? Ils sont libres, au moins.
Stepan : La liberté est un bagne aussi longtemps qu'un seul homme est asservi sur la terre. J'étais libre et je ne cessais de penser à la Russie et à ses esclaves.
2. 반항의 내용
앞에서 부조리한 인간은 어떤 사람이며, 그가 갖는 반항적 성격이란 무엇인지 간단히 살펴보았다. 여기에서는 반항의 성격은 무엇이며, 그것이 갖는 한계는 무엇인가를 좀 더 알아보아 반항인이란 어떤 인간인가를 등장인물들의 분석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A. Camus는 그의 「L'homme Révolté」에서 반항이란 하나의 가치판단으로서, 부당하고 불가능한 조건, 불합리한 광경과 같은 혼돈 가운데서 질서를, 흩어지고 사라지는 것 한가운데서 통일을 추구하는 행위라고 정의한다. 인간조건에 대하여, 전 인류의 공통되는 권위를 억압하는 모든 것에 대하여 분연히 일어서는 이 반항은, 소유하고 있는 어떤 것을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인정하도록 그저 자기를 주장할 뿐인데, 그것은 ‘존재하는 행위 이외의 어떤 것에도 봉사할 수 없는 그 뜨거운 부분’이 존경될 것을 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이 반항은 숙명이 동일하다는 사실에 의해서 타인이 압박받고 있는 광경을 보는 데서도 태어날 수 있는 것으로,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의 연대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하여 부조리의 경험 가운데서는 개인적인 고통이던 것이, 반항의 운동이 시작되고 부터는 이 고통이 집단적인 것이 되며, 모든 인간의 모험이 된다고 A. Camus는 말한다. 그러므로 반항적 인간이란 ‘신성 불가침한 것의 앞이나 뒤에 위치하는 사람이며, 인간적인 질서-그 안에서의 모든 해답은 인간적인 것, 즉 합리적으로 서술된 바의 것인데-를 요구하는데 전심하는 사람’인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반항이 전인간조건과, 참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되는 모든 종류의 침해를 대상으로 하며, 인간 본성에 내재하는 원초적인 가치인 자유와 인간적인 행복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A. Camus는 같은 책에서 반항을 형이상학적인 반항과 역사적 반항으로 구분하고 있다. 형이상학적인 반항이란 ‘인간이 인간조건과 모든 창조에 대해서 항거하는 행동으로서, 창조에 의하여 자기가 기만당했다고 선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역사적 반항이란 이러한 형이상학적 반항을 기초로 역사 속에 나타난 구체적 반항행위인 모든 혁명과 테러 등을 의미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Les Justes」에 나타난 주인공들의 행동과 사상을 이해하기 위하여 반항의 성격을 좀 더 알아보자. 반항의 이유와 목적과 방법은 어떤 것이며, 그 한계는 무엇이고 결과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우리는 앞에서 반항이 전인간조건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불완전하고 분열된 인간조건에 반항함으로써 인간은 신에게 거역하는 것이다. 지금껏 인간의 창조자로서 전적인 책임을 지고 있던 신에게 질서의 이름으로 반기를 듦으로써, 이제부터는 인간 자신이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한 외로운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때부터 반항은 자신의 이유와 목적을 언제나 되돌아보면서 반항의 운동을 전개해 나가야 되는 것이며, 자신의 근본을 파괴해버리지 않도록 그 한계를 잘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반항이란 그 시초에 있어서 인간애의 발로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신에 대해 거역하는 것이나, 부당한 모든 것에 대해 반기를 드는 것은 바로 우리가 인간이고, 그러기에 우리는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것을 주장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반항의 운동이 이걸 잊어버리고, 절대적인 부정을 통해 허무주의로 빠져들어 끝없는 파괴에 몰두하거나, 절대적인 긍정을 통해 맥없는 순응주의에 빠져들고 만다면, 그것은 이미 반항이 아닌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개인주의적이고 허무주의적인 반항자들은 파괴에 도취하여, 범죄도 과오도 죄인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세계의 폐허 위에서 개인, 즉 유일한 주인인 나만 남아서 죽기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죽이기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외치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이 거부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창조가 되는 것이다.
한편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받아들이고 세계의 불행이 더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절대적 긍정에 이르게 되면, 범죄와 개인을 신격화했던 절대적 부정과는 달리, 살인과 동시에 인간 자신이 보편화되고 마는 것이다. 결국 이 양자는 모두 어느 한 극을 향하여 치닫게 됨으로써 반항의 근본을 망각하고 만 것이다.
그러므로 반항은 그 한계를 명확히 알고 지킴으로써, 반항을 완료하고 인간을 그 본연의 모습대로 환원시키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A. Camus는 ‘인간은 존재하기 위하여 반항해야 하지만, 그의 반항은 그 자체 내에 존재하는 한계를, 즉 모든 인간이 그곳에서 결합함으로써 존재하기 시작하게 되는 한계를 존경해야 한다. 따라서 반항적 사상은 반성 없이는 있을 수 없고, 그것은 영원한 긴장인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반항의 모습은 어떠해야 된다는 것일까?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인 존엄성을 요구하는 반항은 인간들 사이의 공모관계, 공동의 조직, 연쇄적인 연대성, 인간들을 서로 닮게 하고 서로 결합시키는 상호적인 교류를 그 제1의 거점으로 한다. 그러므로 ‘반항인이 요구하는 자유는 만인을 위하여 요구하는 자유이며, 그가 거부하는 자유는 만인에게도 금지되는 자유’인 것이다. 한계가 있는 자유, 그것이 반항인 것이다. 인간들에게 공통한 하나의 본성을 암시함과 동시에, 이 본성의 원리에 존재하는 척도의 한계를 명시하는 것이 반항인 것이다.
이리하여 반항은, 머리를 짓찧으면서 인간조건에 거역하는 것이 아니라, 미약하나마 그 감옥을 사랑할 대로 사랑해보고, 우리를 괴롭히는 절대를 같은 인간조건의 일부로 여기게 된다. 이것은 ‘수세대를 거쳐 오는 동안 인간적인 것의 마지막 상징이었던 지중해적 문명’, 종합과 통일과 절도의 그리이스 사상에 기인하는 것이다. 지중해 연안의 태양 숭배자인 A. Camus가, 반항의 운동이 진정한 것으로 남아있기 위해서는 그것을 지탱해 주고 있는 모순의 어떤 항목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마도 여기에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A. Camus는 ‘인간조건의 통일을 요구하는 반항은 생의 힘이지 죽음의 힘이 아니며, 반항의 깊은 논리는 파괴가 아니라 창조의 논리’라고 주장한다. 그러기 때문에 반항의 반대가 아니라 바로 반항인 중용을 택하길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반항이 중용을 명령하고 옹호하며, 역사와 역사의 혼미를 통하여 재창조한다. 이 가치의 기원 자체가, 그것은 짓찢김 없이는 있을 수 없는 가치라는 것을 우리에게 확증해 준다. 반항에서 태어나는 중용은 반항에 의하지 않고는 존속될 수 없다. 중용은 지성에 의하여 영속적으로 야기되고 통어되는 끊임없는 투쟁이다. 중용은 불가능도 심연도 정복하지 않는다.” 결국 반항은 중용, 즉 절도를 통해 그 완성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여기에서의 절도란 안이하고 범속한 조심성과는 정반대의 것이다. 그것은 항상적이면서도 고통스러운 노력을 의미한다. 그것은 현재에 모든 것을 걸고 매달리려는 집요한 의지이며, 삶에게 전체를 걸고 참가하면서 살아가는 유일한 방식인 것이다. 이것이 A. Camus의 정오의 사상이다. 중용을 지키는 반항 말이다.
지금까지 반항의 성격과 한계를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이제 「Les Justes」의 주인공들에게서 나타나고 있는 반항의 모습을 검토해 보자.
3. Kaliayev와 Stepan의 반항
「Les Justes」에서는 Kaliayev와 Stepan이 반항의 두 국면을 드러내면서 전개되고 있다. Kaliayev는 Sartre의 「Les mains sales」에 나오는 Hugo와 마찬가지로, 정의에 대한 불타는 신념과 자기 성장환경의 가치에 대한 거부로 인해 혁명가가 된 지식계계급이고, Stepan은 앞 Sartre 희곡 속의 Louis와 대응하는 광신에 이를 만큼 철두철미한 혁명가다. (물론 「Les mains sales」과 「Les Justes」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이 점은 간과되어서는 안된다.) 「Les Justes」 제1막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대목을 보자.
Kaliayev : J'aime la vie. Je ne m'ennuie pas. Je suis entré dans la révolution parce que j'aime la vie.
Stepan : Je n'aime pas la vie, mais la justice qui est au-dessus de la vie.
Kaliayev : Chacun sert la justice comme il peut. Il faut accepter que nous soyons différents. Il faut nous aimer, si nous le pouvons. ....... (중략) .......
Stepan : Je suis venu pour tuer un homme, non pour l'aimer ni pour saluer sa différence.
Kaliayev는 혁명(반항)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목적으로 삶고 있으나, Stepan은 Kaliayev가 구체적인 삶을 목적으로 삼는 것
과 달리, 추상적인 정의를 목적으로 삼고 있다. 그리하여 Stepan은 정의의 실체인 혁명의 절대성만을 광신할 뿐 그 외의 어떤 것도 추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Stepan은 이 작품에서 Kaliayev의 반항의 윤리에 배치되는 전체주의의 사상을 대변하고 있는 자로서 부각되고 있다.”고 본 임철규씨의 판단은 옳은 것 같다.
Kaliayev의 반항의 윤리는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Kaliayev : Je crois comme eux à l'idée. Comme eux, je veux me sacrifier. Moi aussi, je puis être adroit, taciturne, dissimulé, efficace. Seulement, la vie continue de me paraître merveilleuse. J'aime la beauté, le bonheur! C'est pour cela que je hais le despotisme. .....중략..... la révolution pour la vie, pour donner une chance à la vie ....략....
그러므로 우리는 A. Camus가 Stepan 등을 통해서는 그와 같은 극단적인 반항의 한 형태를, Kaliayev 등을 통해서는 진정한 반항의 모습을 드러내고자 했음을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다. 아무튼 이들 테러리스트들은 Voinov의 ‘J'ai compris qu'il ne suffisait pas de dénoncer l'injustice. Il fallait donner sa vie pour la combattre.’와 같은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부조리에서 반항으로 뛰어든 자들이다. 그것도 ‘Mourir pour l'idée, c'est la seul façon d'être à la hauteur de l'idée.’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l'idée」는 무엇인가? 그것은 révolution이다. 그것은 〈‘un monde où plus jamais personne ne tuera!’와 ‘la terre se couvre enfin d'innocents’〉을 건설하기 위하여 죄를 범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반항인 것이다. 도스또예프스키의 이반 카라마조프가 자기만의 구원을 거부하고 저주받은 자들과 연대책임을 지려했던 것처럼, 그들은 개인적인 구원이나 고독 속의 행복을 바라지 않고, 모든 사람의 구원과 모든 사람의 행복을 위하여 반항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방법과 태도에 있어서 문제는 발생한다. 혁명의 목적이 순수하다고 해서 그 수단까지 순수해야만 하는가, 아니면 불순한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순수한 혁명의 목적을 달성할 것인가? 이는 역사와 혁명에 대한 관점에 따른 반항의 태도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처럼 역사는 발전한다는 역사의 변증법에 의해 혁명은 필연적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후자를 택할 것이며, A. Camus와 같이 역사적 사건에 예정된 방향은 없으며, 미리 정해진 목적도 없다고 주장하면서, 혁명은 단지 인간의 구원과 행복을 향한 하나의 방법일 뿐이라는 자들은 전자를 택할 것이다. 「Les Justes」에서는 후자는 Stepan이, 전자는 Kaliayev로 대표되는 그들의 동지들이 택하고 있는 반항이다. 이는 어린아이의 죽음을 놓고 벌어지는 제2막의 끝부분에 잘 나타나 있다.
(1) Dora : L'organisation perdrait ses pouvoirs et son influence si elle tolérait, un seul moment, que des enfants fussent broyés par nos bombes.
Stepan : ....략.... Quand nous nous déciderons à oublier les enfants, ce jour-là, nous serons les maîtres du monde et la révolution triomphera.
Dora : Ce jour-là, la révolution sera haie de l'humanité entière.
Stepan : Qu'importe si nousl'aimons assez fort pour l'imposer à l'humanité entière et la sauver d'elle-même et de son esclavage.
Dora : Et si l'humanité entière rejette la révolution? Et si le peupje entier, pour qui tu luttes, refuses que ses enfants soient tués? Faudra-t-ille frapper aussi?
Stepan : Oui, s'il le faut, et jusqu'à ce qu'il comprenne. Moi aussi, j'aime le peuple.
(2) Stepan : ....략.... Parce que Yanek n'pas tué ces deux-là, des milliers d'enfants russes mourront de faim pendant des années encore ....략.... Vivez-vous dans le seul instant? Alors choisissez la charité et guérissez seulement le mal de chaque jour, non la révolution qui veut guérir tous les maux, présents et à venir.
Dora : Yanek accepte de tuer le grand-duc puisque sa mort peut avancer le temps oùles enfants ruisses ne mourrons plus de faim. ....략.... Mais la mort des neveux du grand-duc n'empêchera aucun enfant de mourir de faim. Même dans la destruction, il y a un ordre, il y a des limites.
Stepan : Il n'y a pas de limites. La vérité est que vous ne croyez pas à la Révolution. ....략....
Kaliayev : ....략.... J'ai accepte de tuer pour renverser le despotisme. Mais derrière ce que tu dis, je vois s'annoncer un despotisme qui, s'il s'installe jamais, fera de moi un assassin alors que j'essaie d'être un justicier.
Stepan : Qu'importe que tu ne sois pas un justicier, si justice est faite, même par des assassins. ....략....
(3) Kaliayev : J'aime ceux qui vivent aujourd'hui sur la même terre que moi, et c'est eux que je salue. C'est por eux que je lutte et que je consens à mourir. Et pour une cité lointaine, don't je ne suis pas sûr, je n'irai pas frapper le visage de mes frères. Je n'irai pas ajouter à l'injustice vivante pour une justice morte. ....략.... Et, si un jour, moi vivant, la révolution devait se séparer de l'honneur, je m'en détournerais. ....략....
Stepan : L'honneur est un luxeréservé à ceux qui ont des calèches.
Kaliayev : Non. Il est la dernière richesse du pauvre. Tu le sais bien et tu sais aussi qu'il y a un honneur dans la révolution. C'est celui pour lequel nous acceptions de mourir. ....략....
우리는 (1)과 (2)에서 Stepan과 같은 교조주의자들이 취하는 반항의 성격을 잘 알 수 있다. 그들은 혁명을 사랑한다. 그들은 역사의 발전적인 경향, 혁명의 필연성을 믿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위해서, 미래의 완전한 행복과 절대적인 정의를 위해서 투쟁하는 것이다. 그들은 사상의 추상적 보편성을 믿기 때문에 비록 오늘의 인류를 짓밟는 한이 있더라도 그 대가를 치르기로 하면서, 미래의 인류를 위하여 일한다. 여기에 무슨 한계가 있겠는가? 그들은 모든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혁명을 믿지 않기 때문이며, 비록 인민을 위해서 싸우고 있지만, 그들이 자신들의 목적에 방해가 될 때는 그것을 알 때까지는 그들을 해치기라도 할 것이고, 살인자에 의해서라도 정의만 정립된다면 그 뿐이라고 Stepan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A. Camus는 이에 반대한다. (1), (2), (3)의 Kaliayev와 Dora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 어떤 이름으로라도 불의의 수단을 용납한다는 것은 바탕부터 혁명의 실패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반항은 삶에 대한 끈질긴 사랑으로부터 출발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개인의 존엄과 행동의 한계를 주장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혁명이란 고통과 불의에 대한 저항으로서, 폭력으로부터 개인의 근본권리를 보호하는 걸 뜻한다. 그들은 미래사회의 정의 때문에 현재의 인간 삶의 본질을 무시하는 어떤 행동도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비록 이념을 위해서 살인행위를 받아들이지만, 그 어떤 이념도 인간의 생명보다 우위에 놓지는 않는다. 당연히 혁명(반항)에는 그 한계가 있어야 하며, 그 명예는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은 Stepan식의 반항에서, 미래를 위한다고 하면서도 현재 뿐만 아니라 미래 자체까지 위험하게 하는 또 하나의 폭정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반항의 근원에 충실하게, 살아있는 인간들의 삶을 위하여 투쟁해야 되며, 거기에 반항의 명예는 존재하는 것이다.
“반항의 명예는 아무 것도 계산하지 않고, 현재의 생에게, 살아있는 형제들에게 모든 것을 나눠주는 데에 있다. 이리하여 반항은 장차 올 사람들에게도 모든 것을 나눠주는 셈이 된다. 미래에 대한 진정한 관대성은 현재에 모든 것을 주는 데에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만약 혁명이 그 한계를 지키지 않거나 명예를 저버린다면, 혁명은 더 이상 혁명일 수 없고, 혁명에 등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도 문제는 남는다. 살인을 해야 하는 것이다. 한 생명을 빼앗아야 하는 것이다. 반항인에게는 그럴 권리가 있다는 것일까? 비록 그가 의당 죽어야 할 사람이었다손 치더라도 말이다. 하긴 Stepan같은 반항인에겐 이건 문제도 되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Kaliayev에겐 엄청난 문제인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Kaliayev의 행동을 통해 A. Camus는 반항을 완성하는 것이다.
4. 반항의 완성
Kaliayev에게 있어서 살인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그것은 필연적인 것이지만 용서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세상의 부조리와 불의를 척결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살인은 필요한 것이다.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폭력은 불가피한 것이다. 그러나 그 폭력이 인간의 생명과 연관되어 있을 때 그 정당성은 어디에서 발견되는 것일까? 그 모든 것보다 인간의 생명을 우위에 두는 이 다감한 정의의 사람, 반항인에게 있어서 말이다.
“죽기를 받아들이는 자, 그리하여 생명의 대가를 생명으로 치르는 자는, 그의 부정이 어떠한 것이든 간에, 동시에 하나의 가치, 역사적인 개인으로서의 그 자신을 초월하는 하나의 가치를 긍정한다. Kaliayev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역사에 몸을 바친다. 그러나 죽는 순간에 그는 역사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선다.”라고 A. Camus는 말한다. Kaliayev가 자신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이며, 그렇게 하여 그는 자신의 행위의 가치, 반항의 가치를 찾는 것이며, 반항을 완료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Kaliayev의 행적을 더듬어 봄으로써 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테러리스트가 되어 Serge 대공을 죽이기로 결심했을 때, 그는 반항적인 숙명을 받아들인 것이다. 불가피하지만 용서될 수 없는 숙명을.
Une pensée me tourmente : ils ont fait de nous desassassins. Mais je pense en même temps que je vais mourir, et alors mon coeur s'apaise. Je souris, vois-tu, et je me rendors comme un enfant.
이와 같이 그는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을 되찾고 평온해 지는 것이다. 또한 죽더라도 교수형을 통해서 이다. “mourir au moment de l'attentat laisse quelque chose d'inachevé. Entre l'attentat et l'échafand, au contraire, il y a toute une éternité, la seul peut-être, pour l'homme.”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그가 죽기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유죄를 인정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그는 감옥에서 “Si je ne mourais pas, c'est alors que je serais un meurtrier.”라고 말하는 것이며, 경찰국장과 대공비(大公妃)의 제의도 거절하는 것이다.
그는 죽음으로써 살인행위의 정당성만을 찾으려 했을까?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어디에 그 근거가 있는 것일까? 물론 그는 자신의 죽음으로써 살인행위의 정당성을 찾은 것이고, 그 범죄자체까지도 소멸시킨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죽음이 반항의 원초적 요구에 충실하는 순수함(pureté)과 인간에 대한 사랑에 기인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그의 말에서 이것을 확인할 수 있다.
Kaliayev : ....략.... Mais j'irai jusqu'au bout! Plus loin que la haine!
Dora : Plus loin? Il n'y a rien.
Kaliayev : Il y a lamour. ....중략....
Kaliayev : C'est cela l'amour, tout donner, tout sacrifier sans espoir de retour.
그가 살인행위를 하는 것은 증오에서가 아니다. 증오보다 더 멀리 있는 것,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모든 것을 주고 모든 것을 희생하는 그 사랑 때문이다. 이것은 어쩌면 기독교적 신의 사랑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신은 믿지만 -폭탄을 투척하러 가기 전 그는 성모상 앞에서 성호를 긋는다- 이미 실추되어 버린 신의 사랑은 거부하는 것이다.
Kaliayev : ....략.... Je ne compte plus sur le rendez-vous avec Dieu. Mais, en moment, je serai exact au rendez-vous que j'ai pris avec ceux que j'aime, mes frères qui pense à moi en ce moment. Prier serait les trahir.
La Grande Duchesse : Que voulez-vous dire?
Kaliayev ; Rien. signon que je vais être heureux. ....략.... Quand le verdiet sera prononcé, et 'l'exécution prête, alors, au pied de l'échafaud, je me détournerai de vous et de ce monde hideux et je me laisserai aller à l'amour qui m'emplit. ....락....
La Grande Duchesse : Il n'y a pas d'amour loin de dieu.
Kaliayev : Si. L'amour pour la créature.
이 사랑은 또한 모든 기쁨을 거부하고 고통 속에서 서로 사랑하며, Dora가 Kaliayev와 같은 동아줄로 죽기를 바라는 사랑인 것이다. (Dora는 5막 끝에서, 폭탄을 투척하고 난 다음에 추운 밤에 Kaliayev와 같은 동아줄로 죽기를 원한다.)
또한 Kaliayev는 법정에서 ‘la mort sera ma suprême protestation contre un monde de larmes et de sang’, 또 ‘si je me suis trouvé à la hauteur de la protestation humaine contre la violence, que la mort couronne mon oeuvre par la pureté de l'idée’라고 외치면서, 그의 죽음이 이 부조리하고 불의한 세계에 대한 항거요, 반항의 근원에 충실한 순수성의 추구라고 밝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다감하나 불행한 반항인은 그 사랑과 순수성으로 인간의 연대성을 발견하고, 노예로 얽매여 끌려 다니는 수많은 그들의 형제들을 죽음으로써 결합시키고 해방시키는 것이다.
이로써 반항은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A. Camus는 덧붙이기를 잊지 않는다. 죽는 순간까지도 반항인은 철저한 인간이어야 하는 것이다. 고통을 고통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그리하여 Dora로 하여금 이렇게 말하게 하는 것이다.
Ne pleurez pas. Non, non, ne pleurez pas! Vous voyez bien que c'est le jour de la justification. quelque chose s'élève à cette heure qui est notre témoinage à nous autre révoltés : Yanek n'est plus un meurtrier. Un bruit terrible! Il a suffi d'un bruit terrible et le voilà retourné à la joie de l'enfance ....략.... Il doit rire, la face contre la terre!
무서운 비명소리, 그것으로 그는 그의 모든 행위가 인간의 것이었으며, 인간을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반항은 진정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5. A. Camus의 반항이 갖는 문제점
그러나 이러한 A. Camus의 사상에서 발견되는 문제점이 있다. 그것은 혁명의 방식이 생명의 대가를 생명으로 지불해야 된다는 비통한 분위기 속에서 효과있는 것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이 행동의 효율성 속에서 순수성을 찾는 마르크스주의적 변증법에 기초한 Sartre의 혁명가들, 즉 Stepan이 제기하는 의문인 것이다. 그들은 지극히 급진적이며 논리적으로 ‘이상주의적인 가치개념이나 고매한 영혼의 주저 따위를 행동으로부터 추방하고, 영원의 문제 따위에 아랑곳없이 역사 속에 개입하여 행동하는 피 묻은 손의 영웅’을 찬미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Sartre는 자신은 마르크스의 심원한 진실, 역사발전 법칙을 믿고 있다고 선언하면서, 역사의 변증법과 혁명에 불가결한 폭력의 정당성을 거부함으로써 인간행위 가운데서 부조리 밖에 발견하지 못했다고 A. Camus를 비난한다.
그러나 무장한 이데올로기들의 자기 합리화에 의한 끝없는 공포와 죽음의 세계에 직면하고 있던 A. Camus가 발견할 수 있었던 반항의 논리는 이와 같은 것이 될 수밖에 없었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정확하게 의문에 대한 해결책을 마련해야겠지만, 필자의 좁은 식견으로는 판단이 힘들기 때문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으로 그치고자 한다.
三. 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어떻게 부조리한 인간이 반항에 이르게 되고, 그 결과 죽음을 선택하여 반항을 완성하는가를 A. Camus의 「Les Justes」를 중심으로 알아보았다. 요약하여 말하자면, 끝 모를 심연에 빠져 방향을 잃고 헤매는 이 시대 상황 속에서 인간은 부조리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 부조리의 초극을 위해, 부조리의 감정을 불러일으킨 전 인간조건과 참을 수 없는 침해에 대하여 반항하게 되며, 그 반항은 인간에 대한 사랑에 기초한 인간의 행위이기 때문에, 한 생명에 대한 대가는 생명으로 지불함으로써 반항을 완료하는 것이다. 이것이 「Les Justes」에 나타난 A. Camus의 반항의 사상이다. 즉, 인간애와 목적과 방법의 순수함을 추구하던, 1905년대 러시아 테러리스트들의 행위 속에서, A. Camus는 인간을 구원할 중용의 철학, 정오의 사상을 발견한 것이다. 이제 다음과 같은 A. Camus의 말로 이 글의 대미를 장식하고자 한다. “Kaliayev와 전세계 그의 형제들은 신성을 거부한다. 그들은 죽음을 줄 수 있는 무한한 권력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들은 오늘날에도 독창적인 오직 하나의 규범을 선정하여 우리들에게 모범으로 남겨주었는데, 그것은 ‘사는 법과 죽는 법을 배울 것, 그리고 인간이 되기 위하여 신이 되기를 거부할 것’이다. 반항자는 사상의 정오에서 신성을 거부하고 인간 공통의 투쟁과 숙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 각주가 원본에는 있는데 여기엔 빠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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