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서재/그 이후

1983 시 이후 2

개구쟁이 막내딸 2024. 8. 16. 14:51

솜망치를 들고

 

굳이 살려하는 사람들 틈에서

까닭없이 다투다가

습관처럼 웃고 마는 해어름

주눅들린 거리에서

풀빵을 들고 당당하게 외치는 너를

사랑하다가

빛을 외면해야 하는 굴지성 모가지 대신

애잖은 다리만 부러뜨리고

술만 퍼마시면서

네 눈물 탓만 한다

조상 탓만 한다

맹물만 마시고 아이들은

배고픈 아이들은 눈싸움이나 하고

시신들은 몰려 와 등불을 켜지만

방안에서 말라죽는 꽃들을 보면서

언 손을 부비는 행상할미를 보면서

볼수록 어지러운 이 땅을 보면서

소록도로 떠나거나 겨울

이 빙판에 넘어지거나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는 나는

쓸데없는 성을 쌓다가

부잣집 문전에서 눈치를 본다

솜망치를 들고.(’81. 1)

 


빛부리 타령

 

찔리고 밟혀서 더욱 견고해진

가슴, 빛부리의 거리에서

아이들이 비누거품을 날리고 있어

낮술에 취해 떠도는 사내야

밤새워 안경을 두들겨 깨고

너의 눈을 떠 봐

끝난 건 아무 것도 없어

계집의 허리를 껴안고 뒹굴어도

포기한 건 아무 것도 없어

처음부터 끝내거나 포기할 그런 건 없었어

우린 다만 말없이 걸어오고 있었을 뿐

들어 봐

먼 옛날부터 버림받은 이 땅

말없이 갈고 씨뿌리는 발자국 소리를

결코 쓸데없이 소리치지 않고

쓸데없이 눈물흘리지 않고

피흘리며 일어서고만 있는

사람소리를

북을 쳐 봐 이제

열 손가락이 잘리워도 쳐 봐

죽은 자는 그냥 쓰러진 게 아냐

노래가 끝난 게 아냐

가녀린 불씨들이 어둠 속에서

하늘 열어 깃발을 꺼내 들고

가만가만 모이고 있어

한 번도 무엇이 되려 하지 않은

한 번도 욕심부려 보지 않은

있는 그대로 풀꽃 같은 사람이고 싶은

마음들이 문 열고 있어

부처님도 예수님도 공자님도 또 누구도 우린 몰라

더는 휴대용 장난감일 수 없고

더는 기계일 수 없는 맨주먹들이

밤하늘에 불을 켜고 있어

사랑가를 부르고 있어

아이들의 비누거품 온 천지를 덮을 때까지

아이들의 웃음소리 온 누리에 가득할 때까지

낮술에 취해 떠도는 사내야

우리 어깨 겯고 발맞춰 나가자

아이들이 주먹나팔을 불고 있어.(’81. 4)

 


땅 끝 소망

 

겨울비 소리없이 바다 위로 내렸다가

다시 포말로 일어서는 그 끝에

여린 빛 한 줄기 반짝이는

땅 끝에 와서 들어보아라

수천 년 말없이 몸으로만 살아 온

떠밀리고 떠밀려 여기에 이른 사람들

불끈 쥔 두 주먹으로

어둠에 맞서 가슴에 불 켜는 소리를

더는 떠밀려 살지 않겠다는

더는 숨죽여 살지 않겠다는

그리하여 발길을 막고 선 저 눈부시게 푸른 바다에

내 손으로 길을 내고

희망의 씨앗을 뿌리겠다는 소리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들아

무등의 흰 눈으로 우리 앞에 다가 온 새해 아침은

그렇게 가슴 여는 소리로

우리 앞에 우뚝 서 있지 않더냐

보충수업 자율학습에 지친

잠 한 번 원없이 자는 게 소원이 되어버린 아이들아

풀린 눈은 이제 접어 날려 보내자

맑고 싱싱한 눈망울로

그리운 사람에겐 편지도 쓰고

짝궁하고 티없이 환하게 웃음꽃을 피우고

운동장엔 흙먼지 흩날리게 하고

모든 들과 산과 바다에

너희들의 고운 이름들

발자국으로 남아있게 하자

너희들이 거리거리에서 삶을 익히는 동안

학교의 밤은 적막으로 숨 쉬라 하자

아, 그리고 아이들아

짐승만도 못한 사람들이라거나 제도

반도의 허리를 가르는 철조망 같은

이 땅의 어둡고 더러운 것들 싹 쓸어서

불살라버리고

사람같은 사람들만 남아

어깨동무하고 춤추어 보자

북녘 땅의 새 친구들과도 뜨거운 악수를 나누자

희망이 샘솟는 새해에는 애들아

이렇게 우리 손으로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자. (1995.1. 광주여고 교지 권두시)

 


죄인들의 고백성사

 

1998년 4월

나뭇가지에 새순 돋지만

우리들 조그만 가슴마다 피눈물 고인다

 

아가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귀여운 딸아

네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느냐

못난 이 에미 두 살배기 널 두고 먼저 간다

너는 눈치보지 말고 오래 살아

직장 잃고 거리를 헤매는 아빠의 눈물

네 맑고 고운 눈빛으로 훔쳐 주려무나

 

아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자랑스런 아들아

어쩌자고 목을 매느냐

말도 못하고 옴쭉달싹 못하는 늙고 병든 이 에미에게

조금만 참으면 참한 색시 얻어 편히 모시겠다더니

그까짓 직장이 무엇이라고

그까짓 돈이 무엇이라고

에미 가슴에 대못을 박느냐

아가, 내 자식아, 어서 내려 와 내 품에 안겨 다오, 아가

 

엄마, 배고파, 밥 줘, 엄마!

엄마, 일어나, 목말라, 엄마!

엄마, 바보야, 일곱 밤이나 잠만 자냐?

나 춥고 배고프단 말이야!

 

어머님 죄송합니다

이젠 날품팔이 노동일 자리도 구할 수 없네요

병든 어머님 미음 한 끼조차 쒀 드리지 못하는

자식도 자식인가요

차라리 제가 떠나면

동네 사람들 어머님 한 끼 밥은 해주겠지요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이 성한 팔다리가 밉습니다

결 곱던 어머님 얼굴에 흐르는 뜨거운 눈물

더는 바라만 볼 수 없어 떠납니다

용서하십시오, 어머님.

 

등짝이 휘도록 일한 죄

신나게 노는 방법도 모르는 죄

돈 없어 학교도 다니지 못한 죄

별 볼 일 없는 가문에서 태어난 죄

죄 많은 죄

죄 없는 죄

죄들이 쌓이고 쌓여 우리들 여린 가슴 짓누르고

그만 잠들어버리라 한다

다시는 일어나지 말라 한다.

(1998. 4.)

 


새 아침의 소망

 

새천년 새아침

뉴욕, 시드니, 모스크바, 런던, 북경......

서울에서도, 광주에서도

똑같이 폭죽이 터지고

벌써 세계는 하나

춤추고 악을 쓰며 노래하는 사람들

표정까지 같다

 

놀라 잠깨어 바라보는 무등은

히말라야도 킬리만자로도 아닌

어제의 그 모습 그대로

흰 눈을 덮고

그윽한 눈빛으로

나를 깨운다

 

신나게 DDR을 밟다가도 문득

인터넷 스타크래프트에 빠져 있다가도 문득

정신없이 영어 단어를 외우다가도 문득

시험점수에 가위눌리다가도 문득

딸아, 너는 고개 들어

허리 잘려 신음하는 조국 한반도를

엄마 아빠도 없이 배고파 훌쩍이는 어린 아이를

돈을 벌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 온 엄마 아빠를

보아라, 그리하여

이 아침에 우리 함께

너다운 우리다운 꿈을 그려

종이비행기에 실어 온 세상에 날려보내자

 

  못생긴 내 짝

  힘없고 돈없는 엄마 아빠

  우리는 없는 것도 함께 나누며

  활짝 웃잖아요 모두모두

  사랑해요

 

아파트 숲 가운데 홀로 떨고 섰던

못생긴 장미 한 송이

어느 새

교정 뜰 앞에 앉아

발그레한 얼굴로

눈 덮인 넉넉한 무등을 보며

환하게 웃고 있다.(2000. 1)

 


부활의 노래

 

새천년 첫해 유월 십삼일

남북 정상 평양에서

서로 손잡고 차 타는 광경 보면서

어머니,

지워버린 당신 얼굴에 묻어 있던

눈물자국 봅니다.

 

개신교, 카톨릭 신자가 부부되어 살더니, 이제

철천지 원수 이북 공산당 괴수와

손 맞잡고 환하게 웃는 모습 보면서

아버지,

지워버린 당신 얼굴에 피어나는

찔레꽃 향기 맡습니다.

 

수백만 주검들이 뒹굴던 한반도

이리 저리 가르고 또 가르던 가시 철조망에 찔려

넘쳐흐르던 붉은 피들,

덕지덕지 엉겨 붙다가 독수리 발톱을 불러 후벼파던

어머니의 허연 살덩이

50년 넘으니 이제 썩어

새 살이 돋는 건가요?

 

미안해요, 사돈

내 아들을 죽인 게 사위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50년 세월 동안 무작정

잘 생기고 잘 난 내 사위를 증오했군요, 용서해 주시구려.

이제 마지막 가는 길에, 사돈, 할 수만 있다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내 딸과 내 사위

그 밝은 웃음 넘쳐흐르게 하고 싶구려

외할머니 여윈 손이 할머니의 여윈 손 붙잡고

하염없이 울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보이는가요

어머니, 들리는가요

이제 할머니도 외할머니도 다 떠나고

좌우익이 한집에서 어울려 살다 차례로 죽어 나간

남녘 땅 외딴 섬 뒷산에도

진달래꽃 붉게붉게 북소리로 달려오고

푸른 파도 하얗게 부서지는 갯바위에서

흔적없이 날려보냈던 종이비행기들

지워버렸던 당신들 얼굴 싣고

따따따 따따따 주먹나팔을 불며

돌아오고 있습니다.(200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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