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대안내
아무데서나
빈 엽서는
찬바람의 손을 잡고 떠나고
여인숙에 머무는 사내들의
반쯤은 살아지고
반쯤은 취하는
콜록거리는 일상.
9대째 다시 짓고 다시 짓는 거미집은
갈수록 끈끈하고
분주하지만,
구경거리일 뿐인
개구리 왕국의 배반자가
용산행 완행열차를 타다가 타다가
쫒겨 와
암흑을 습격하는 눈(雪)들을 지켜
뻐로 남은, 지하의
견고한 콘크리트 빈 방에
<빌려 줌>
할딱거리며 붙어 있다. (1977. 1)
장단이나 맞추는 내 말
- 인간적인 고백 I
무대 밖에서
소녀의 남루한 꽃은
안개를 헤집다 헤집다
발가벗은 이조 아낙이 되어
온 세상을 불사르고
웃기도 하지만
장단이나 맞추는 내 말들은
하늘로도
바다로도
땅으로도
떠나지 못하고
우체통 주위를 떠돈다 한다
가끔은 한밤중에 주르르 울며
죽은 아비 어미의 손들을 잡아도 보고
가끔은 빗속에서
어디로나 떠나는 눈물들을 웃음들을
후줄근히 만나도 보는 모양이지만
많이는
갯바람 부는 무대 위에서
술취한 꽂게마냥 비틀거리거나
가시내의 허벅지나 간지럽히다
소록도로 떠밀리는
겨울바다의 희끗거리는 옷자락이라 한다
장단이나 맞추는 내 말들은. (1977. 3)
이슬비의 송신문
하루는 사형수가 졸린 목을 붙잡고 웃었다. 이웃에서는 운이 나빠서 술을 마신 봄볕이 아스팔트 위에서 자지러지고, 무풍지대에서도 떠밀리는 낙엽보다 더 일찍 잠들어 있는 도시의 거리를 빤질나게 오가는 붕의 소문은 무수히 부딪쳐서 더욱 예리해진 발톱이었으나 긴긴 얘기처럼 견뎌내기만 하는 빈터에서는 이슬비 소리나 담아 두는 양은 그릇이다. 하긴 서울비나 광주비나 매 한가지라는 거지아이가 배고픔으로 토해내는 맹물 속에서 자살했다던 젊은 시인이 무전을 치고 있다 - 뿌리 없는 것들아 사화산이 이상하다 - 하루는 히히 사형수가 졸린 목을 붙잡고 웃었다. (1977. 4)
이웃(隣人)
우체국 돌계단에선
정갈한 바람만 몰고 다니는 미친 에미
합법적으로 강간당한 순이
모두 내다 버리고 맨날 비틀거리는
꽂게의 손, 손들이 악수를 나누고
패망한 왕국의 조율사들은
소리내는 방법대신
휴대용 언어만 무성히 가꾸다가
깨진 도시의 찻잔에 절룩이며 모여 들고
앙상한 목발 하나로 죽음을 견뎌내는
허수아비, 나의 이웃들은
땡볕에서도 증발하지 않는 이슬들을
입벌린 논바닥에 뿌리다가
미친 에미도 순이도 모두 데불어
에밀레종을 머리로 받고
뎅뎅 소리친다 사람이라 외친다
죽기까지는 절대로 쓰러지지 않는. (1977. 9)
넋두리
분수대 주위를 맴돌다가
끈끈한 눈물 몇 방울 데불어
헐떡거리며 쫒겨 온 바위섬
섬은 바다를 휘감고 서서
염라대왕처럼 하얗게 웃고 있고
나는 잊고 있다
벼랑 끝에서 남루한 옷을 벗고 투신한
갈매기 한 마리와
참으로 떠나기 위하여
헤어지면서 쉬지 않고 만나는 바람
바람이 풀어 놓은 안개 속에서
허우적이며 호르라길 부는
배를. (1977. 10)
날림으로 집을 짓다가
겨울 백사장에 바람이 서성이다
솟구치는 어둠 속에서
떨어진 사제의 모가지
모가지에 핀 꽃
얼빠진 아이로 한참 섰다가
바쁘게 되돌아 가는 순이의
말간 얼굴에 덕지덕지 달라 붙는
천년의 사랑이다 아니다
어설픈 지아비가 오천년을 기다리다
바보도 되지 못한 채
짓이기고만 있는, 짓이기고만 있는
흙이다
파란 하늘이다
날림으로 집을 짓다가
기다리던 손님을 맞았다
허깨비를 맞았다
망나니의. (1978.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