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 편지
망월동 지나면
사루비아 멍울멍울 피멍울이더라
이제는 외치지 않는 하늘
밤낮으로 설운 땅 위로
장마는 지고
잡초만 뚤린 가슴 위에 무성하더라
이름조차 잃어버린 너희는
천국에서도 지옥에서도 여전히
타고 있느냐
빛이 되고 있느냐
애비는 너희도 보내고
이삭도 패지 않는 논두렁에 앉아
물벼락을 맞고 있구나
물벼락만 맞고 있구나
그래도 애들아
오늘은 문간방에 불을 지피고
손님을 기다려야겠다
예쁜 새 한 마리 아직 울고 있다가
너희 위해 울고 있다가
쓰러져 누우면
눈 감고 있어도
입 다물고 있어도
내 사랑 내 새끼 아니겠느냐. (1980. 9)
告白II
-귀향하여
돌아 올 땅이라도 있는 자처럼 돌아 와
다시 헤매는가
헤매다 마는가
마당에는 얼쑤 굿거리가 한창이고
땅 속에서 허연 눈으로 너희가
푸른 하늘을 꿈꾸고 있는 동안
구경만 한다
에미의 피
애비의 망령
아우의 5만원짜리 월급봉투를 팔아
대학씩이나 다니면서
누이의 몸값으로 술이나 퍼마시면서
우체국 돌계단에 비맞고 앉아
찢기운 아우성을 들여다 보는
들여다만 보는 거지
아아 희한하게 웃고 있다
아스팔트 녹아 흐르는 그날 오후
잠꼬대하는 허수아비처럼
도망치면서도 쫒기는 거라고
끝끝내 에미 애비 아우 누이는 내가 아니라고
완행열차를 탔었지
어디에서 멈출 것인가
남도 끝 벼랑에 파도는 몰려 오고
밤은 더욱 깊다.
되돌아 보지 마라
빈 술병처럼 거리에 널려서
시든 꽃 위에 난무하는
하루살이들
수시로 떠밀리고 떠가는
네 껍데기를 아끼려느냐
되돌아 보지 마라 이제
황량한 이 들판에서
맨 손으로 눈 뜬다 어허
이 자갈밭 가시밭길에서
내가 널 네가 날 만난다
피멍울로 만난다
여기가 내 땅이다
피하지 마라 눈 감지 마라
바람막이 하나 없는 내 땅
때 묻고 땀에 절은 누더기
조각나고 조각나고 또 조각 나
주검들만 썩고 있어도
여기가 내 집이다
돌아서지 마라 돌아서지 마라
맨 주먹 불끈 쥐고
문 열어라, 깜깜한 어둠의 문을. (1980. 10)
幻聽
- 죽음은 빛으로 오고 생명은 어둠으로 다져진다
I
당신들도 알잖아요
내쫒지 말아요
부르터진 이 발로 그냥 가란 건가요
보고 싶어요, 얼굴만이라도 만져보고 싶어요
욕심이 아니어요
미치지 않았어요
아버님 퇴직하신 것도
어머님 몸져 누우신 것도
친구들 떠난 것도 그 어떤 것도
슬프지 않아요 말하지 않겠어요
얼어붙은 땅 속에서도 아직
살아있는 그이의 미소
보고 싶어요 그것만 만지작거리겠어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겠어요
내쫒지 말아요
돌아서지 말아요
혼인신고도 못했어요 믿어주세요
제 마음이 증거에요
죄송해요
천한 내 몸뚱어릴 원하신다면 기꺼이 드리겠어요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어요 얼어붙은 그이의 손발
녹여드리고 싶어요
당신들도 알잖아요, 네?
II
문 좀 열어라
누가 오지 않았느냐
내가 이 땅 속에 썩고 있어도 좋다
피고름 냄새 풍겨도 좋다
문 좀 열어라
귀한 손님이 오시지 않았느냐
보여 줄 건 보여줘야 되지 않겠느냐
내 눈, 코, 귀, 입 다 막아도
알 것은 안다
깜깜한 이 땅 속까지 들려 오는
아내의 사랑가, 날 부르는 소리
아, 다시 죽어도 좋다
문 좀 열어라, 가서
야윈 뼈 마디마디 쓰다듬으며
온 세상 눈물 방울 하나 하나
나인양 사랑하라 이르겠다
이도 안된단 말이냐, 이 놈들아
나 비록 죽었으되
분노와 저주의 내 칼끝이 하늘을 가르고
썩어가는 육신들 눈뜨게 하리니
문 열어라
회개하여라, 이 놈들아! (1980. 11)
나의 사치(奢侈)
도시에선 밤낮으로 별이 잠자고 있다
간혹 자정이 다 되어 퇴근하는 우리 순이가
힘없이 눈 뜨는 별을 본 적 있다 우기고
끝내 울어 버릴 때
잠 들지 못하는 별 서넛 밤이슬을 내리지만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데 별들이
눈 뜰 이유가 없다
미친 개만 몇 마리 밤이슬 맞으며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 없이
젖은 신발들만 뒹구는 내 뜨락에서
감기 걸린 목소리로 짖고 있다
깜깜한 도시의 밤하늘 향해
짖고 있다. (1980. 12)
겨울 대합실에서
텅 빈 거리에 큰 눈이 오고
넘어진 나무들 다시 넘어져 묻히면
살았거나 죽었거나 교양있는 사람들
반 평도 못되는 신문지 위에서 뺀들이 눈으로
수근거리고 외치고 춤추고
차라리 함이나 팔고 싶은
젊은 사내들은
라면 한 그릇으로 하루를 때우고
시린 손을 부벼 모가지뿐인 눈사람을 굴리는데
발가벗은 에미여 어디로 가는가
때 묻은 누더기를 걸치고
대합실엔 배고픈 꼬마들만 떨고 있다
이를 물고 여윈 손을 흔들고 있다
무등산은 깃발을 내리고 말이 없는데.(1980.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