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누구와 다투고 있느냐
거리마다 노란 줄이 쳐져 있고
한눈팔지 않는 사람들이 모여
일렬종대로 산다
바람이 머리칼을 세우며 지나가고
흩어 진 한 해가 소줏잔을 넘쳐 흘러
시린 손을 적시면
멀리 폴란드 갱 속에 갇힌 자유가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넘쳐흐르는 선혈이
푸념처럼 내 발아래 떨어져 웃고
군화소리 들린다
어릴 적 내 고향 섬사람들
가난해서 그렇게 어울어져 살았을까
못 배워서 그렇게 걸릴 것 없이 살았을까
속없이 떠나 와서 저주만 배우고
사람은 잊어버렸다
굴비두릅처럼 엮여있는 힘없는 사랑들아
너는 누구와 다투고 있느냐
술값도 없는 나를 붙잡아 놓고
서울집 누님은 「진달래꽃」을 멋지게 불어대다가
애비를 애비라 부르지 못하는 애비없는 자식들
곱게 재워 놓고
눈 내리는 맨션아파트의 불빛을 올려다 본다
들쳐 업고 달릴 사랑 하나 없이
시내버스 손잡이에 매달려 돌아오는 길에
나는 자꾸만 한 쪽으로 기울어진다
조각난 땅이 끝없이 갈라지고
디딜 곳이 없다
내 맞잡을
사람 손을 내밀어 다오. (1982. 1)
우리들이 서있는 자리
어릿광대 하나
서방정토 가는 길이
온통 무너져 내리는 해질녘
하늘 한 쪽 마른 풀에 매어 두고
소리내어 울고 있다
쓸데없이 거리를 휘젓고 돌아오면
부쩍 힘이 나는 내 거짓은
무등산쯤이야
닭죽 속에 빠뜨려버려도 남아도는 풍요로움으로
고갤 들고 걸어도 고갤 숙이고 걸어도
떨쳐버릴 수 없는
말로 된 진실과 순수의 누더기를 휘날리며
까치 한 마리 없는 까치고개를 넘어 와
빈 방 하나를 점령하고
망부석을 무더기로 쏟아 놓는다
어디에 있는가
나는 떳떳한가, 사내야
곱사춤을 추면서
온 산에 불을 지르고
안질 걸린 눈으로 비로소 바라보아라
말씀의 사원은 여전히 분주하고
목마른 눈물 서넛, 마른 풀과 어울어지다
하늘을 놓아 주고 있다
말없이 땅 딛고 섰다
하루쯤은 손쉽게 빼버리고 하늘은 여기
여전히 푸르고. (1982. 4)
약속을 하자
- 선태부부에게(결혼 축시)
가슴 아픈 이 5월에
나무들은 잔가지를 펄럭인다
여전히 잡초 무성한 들녘에서 우리
여윈 얼굴 맞부비며 뒹굴어 보자
그립고 정겨운 이들의 젖무덤에
들꽃 한아름 안겨주고
손 내밀어 약속을 하자
질머리를 돌아 나오는 길목에서
바닷바람을 몰고 다니던
한반도의 남도 끝 고집스런 전라도 사내여, 여인이여
기억하는가
그대를 키운 저 섧고 매운
애비 에미와 그 애비 에미의 애비 에미가
흘린 피와 눈물을
이제 다시 시작하는 사내와 여인이여
더는 헤매지 말라
더러는 옴팍집 다락방에도 기어오르고,
상무대 막사에서 소리소리 비명을 지르고,
문화동 벽돌담 안에서 밥을 거부했어도,
그리하여 그리움으로 부르튼 발바닥
온 한반도에 넘쳐 흘렀어도
여전히 우리들은 뜰 하나 없다
그러나 그대들은 안다
우리는 믿는다
이곳이 바로 그대들이 뿌리 내릴 척박한 땅임을
그대들의 뒤를 쫒는 크고 검은 그림자들이
나꿔채도 나꿔채도 넘어지지 않고
큰 뿌리 내려 자유와 사랑의 열매 맺으리라는 걸
보라
가시밭길 돌밭길이던 오늘
하나로 뭉쳐진 저 사랑과 축복의 눈길을
모두가 껴안고 춤추는 저 가슴 속 불꽃들을
가장 떳떳하고 자랑스런
우리 친구여 여인이여
그대들은 영원히 샘솟는 자유와 사랑의 우물이어라
온 천지 뒤덮는 불길이어라, 불길이어라.(1982. 5)
자정 넘은 빈 하늘을 보고 개가 짖는다
습관처럼
자정 넘은 빈 하늘을 보고 개가 짖는다
지키고 간직할 게 많은 사람들
알맞게 살도 찌고, 알맞게 무게도 있다만
내놓을 것 없이 잠 못 이루는 사내
1982년 8월의 한반도에서
너무도 쉽게 떠들고 금방 웃어버리는
표준규격 모조인간들을 만나고,
자신의 거울을 남김없이 깨버리고도
화사하게 웃는 이국산 인형들의 행진을 보면서
경박하게 소두 몇 잔에 흔들거리고 있다
40여년 전 이 땅은 해방이 되었다 하고
4000여년 전 이 땅은 세워졌다 하고
또 몇 년 전 이 땅은 했다 하고, 했다 하고.....
사실들만 두루 쌓여 견고한 성
속없는 어느 시인이 모든 껍데기를 몰아내도 견고한 성
성안 사람들은 지체가 높아
황토길 옆 널부러진 욕지거리 우리의 하루를
카페트를 깔고 드나들고
적당하게 어루만져지고 쑤셔지는 성 밖 천덕꾸러기들의
흉터에서
알맞게 더운 피가 새어나오면
세울 것이 아직 겁도 없이 많은 성 안
풍년가 소리 드높다
비가 내리고
어둠 건너 수천년 동안 잘려 온 육신들
회동이 있나보다
그 누구도 범할 수 없는 처녀 하나
죄도 없이 이름도 없이 매달린 모가지들
희디 흰 속곳에 넣어다가
백제 황산벌 어느 논두렁에다도 놓고
요동 반도 잊혀진 어느 풀섶에다도 얹어 놓고
고려 쫒겨 간 제주섬 한 모퉁이 밀리는 파도 위에다도 올리고
새남터 달빛 가득한 한강 백사장에다도 세워 두고
간도 얼어붙은 땅 속에다도 넣어 두고
남양군도 외딴 섬 왜놈 사타구니 속에도 쑤셔 넣고
낙동강 무성한 갈대밭 엉긴 핏속에다도 빠뜨리고
마산 검은 기름바다 속에다도 쇠못 박아 집어 넣고
광주 금남로 자욱한 연기 뜻 모를 바람에도 실려 보내고
담담하게 옷벗고 있다
아, 한반도의 사내란 사내여
모두 그대들의 성기에 불을 붙여
강간하라, 사랑하라
저 앙상한 우리 누이를
빈 술병이 넘어지고
습관처럼
자정 넘은 빈 하늘을 보고 개가 짖는다. (1982. 9)
애비의 선물
밤 늦게 휘청거리며 빈 손으로 들어서는 애비를
맨발로 뛰어 나오며 반기는 내 딸아
무릎이 다 드러난 내복바람으로
온종일 골목 안을 뛰어다니다
흙 묻은 손가락만 빨다 지친 내 딸아
내가 네게 줄 것이 무엇이냐
부잣집 아이들의 희고 포동포동한 살결
달고 영양가 많은 간식
값 비싸고 울긋불긋한 옷가지
신체발달을 위한 장난감
지능개발을 위한 장난감
교육보험, 의료보험, 그 어떤 것도 없구나
새다리에 눈만 초롱초롱 큰 내 딸아, 그래도
너는 울지 마라 기죽지 마라
이 애비 뼈골이 부서져도 네 녀석만은
가난하나 쓰러지지 않는 우리들 볼 부비며
곱고 자랑스런 사람으로 키우마
아귀다툼, 악다구니 없고
아무리 배워도 남 위에 서지 않고
돈 때문에 울지도 않는
모두가 어울어져 춤추는 꽃밭, 너희들의 뜰 하나
이 몸 짓이겨서라도 마련해 주마
이웃집 아이의 장난감 자동차를 얻어 타고
오랜만에 활짝 웃으며, 뽀뽀뽀 친구를 외치는 내 딸아
언제나 그 맑은 눈에 웃음만 고이거라
애비가 네게 주는 건 이 약속, 이 눈길뿐이다. (1982. 10)
종이비행기를 날리는 내 동무
갑오년이나 기미년에 죽은 사람들 알 바 아니고
끝없이 속여야 속지 않고 산다는 삶의 법칙을
나이 서른 이제야 깨닫겠다던 섬사람
그래도 어릴 적 공책 찢어 함께 날린
종이비행기들 여전히
파도 일렁이는 바다 위로 날고 있다고
지난 추석 갯펄을 그러쥐며 울던
지지리도 못나서 가난하기만 한 꼽추, 내 동무
보리라도 갈아 먹을 떼밭 한 자락 없어
장가도 못가는 굽은 등 위로
백만원이나 하는 대학등록금 얹어 놓고 동생놈은
저 푸른 바다로 걸어 들어가 버렸다더니
이제는 채석장에서 돌을 깨고 있는가
고등학교 선생이 된 영악한 나는
종이비행기는 날리지 않고
바위에 부딪치지도, 머릴 쳐박고 바다에 떨어지지도 않는
원격조종 비행기만을
안전하게 날리고 있는데
바람 한 점 없이 늦가을 가랑비가 내리고
교정 뒤뜰의 언덕 위에 그대가 보낸
죽지가 젖은 새 한 마리
검은 바위를 쪼고 있다.
- 종이비행기를 날려야 해, 끝없이. (1982.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