脫出記
순이도 철수도 버리고 떠나 와
토끼눈을 하고 나는
허깨비를 지키고 섰는가?
헐벗은 나무마다 이 겨울에
바람으로 울타릴 쌓고
새남터의 장대 끝에는 囚人의 얼굴이 웃고 있다
구경꾼이 익숙하게 罪를 털어내는 동안
하늘에 구멍을 뚫고 囚人의 모가지가 승천하고
罪만 남아 빈 강뚝을 치달리면
죽어도 斷罪할 줄 모르는 망나니와
그의 칼이
한 평자리 토방에서
거울을 들여다 보고 있다
울타리는 바람의 울타리는
더욱 견고하게 쌓이고 있고
돌개바람이 한참이나 머물러 있을 뿐
엉성한 언어만 병자처럼 비틀거리고 있는데
마을에서 새벽기차 돌아오는 소리 들린다
망나니야, 너를 이제
나의 애비인 너를 나는
베어야 한다. (1978. 1)
70年代의 사내
- 어릿광대
죽은 나무가 살아나는 거리에서
우리는 모두 멍청합니다.
간혹 조금 크게 웃다가
허탈한 얼굴로 일어서거나 하는
사내들
하잘 것 없는 얘기들이 쌓이는
쌓여서 부유한 나라에서
어설픈 손짓으로
아무거나 불러 세우면서
이쁘게 이쁘게 웃고 있습니다.
아스팔트를 떠나지 못하는 대낮에
여전히 나는 휴대용 장난감이고
忍冬의 소나기
양은 그릇 하나에 모두 담길 때
꾸깃거려지고 있는 사내들
너절하게 웃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확인하지 못하면서
소나기는 내릴 때부터 미지근한 물이라고
떠들고 있습니다.
주정뱅이처럼 비틀거리면서
허깨비만 지키고 있습니다
허깨비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1979. 4)
무엇이 남았는가
바다에는 풀풀풀 어둠이 내리고 있다
누이의 가슴에 쌓이는 안개들 스물스물 일어나고
五千年을 들여다 보고만 있는 사내
땅파고 있다
갯바닥에 주저앉아 빈 손질만 하고 있다
죽음은 서툴게 자맥질하는 연체동물처럼 쑥스럽고
내 세살박이 아이는 보채고 있다
돌팔매로 내 심장을 맞추고 나를
해고시킨다
무엇이 남았는가
달빛에 실려 고깃배가 흩어진 그물을 모아 온다
그물에는 바닷물만 걸려 있다
세상에는 살아 있는 것들이
있을 뿐인 이름들이
인삼 녹용에 소화제를 먹으며
졸지도 않고 당당하게 회초릴 들고
경복궁을 복원하고 있다
구경만 하다
아무 것도 없는 바다를 지키면서 나는
허름하게 웃는다
나를 해고시킨다 그래도 아직
무엇이 남았는가, 그대. (1979. 5)
살아 있기 위하여
- 노동자 누나 박기순의 무덤 앞에서
기순아, 나는 너를 몰라야
육순 노파의 흐느낌이
눈내리는 겨울 아침, 너의 가는 허리 위로
내리고 있을 때
나는 술이나 퍼마시고 있었다
비틀거리면서 도망치고 있었다
허깨비나 만나자고
파도보다 먼저 부서지는 바람 속에서
허둥거리고 있었다
기순아
아무 것도 지니지 않고 너는
열심으로 베풀고 있구나
살아 있구나
어처구니 없는 나는
벌써 나밖에는 모르는데
알몸으로 너는
우중충한 하늘을 떠받치고 있구나
비가 되어 마른 대지를 적시고 있구나
다시 살아 있구나
거대한 기계 옆에서
엉성한 움막의 밤을 밝혀
너는 빛나는 눈망울로
열심히 삶을 얘기하고 있는데
갯바닥에서 나는
계집의 허벅지나 간지럽히며
내일이 두려워
허망하게 웃고 있구나
여전히 술마시고 있구나
비가 온다, 비를 맞으면서도
나는 너를 몰라야, 기순아. (1979.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