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서재/대학﹒전경 시절

1981년

개구쟁이 막내딸 2024. 8. 16. 14:40

방울뱀 시대

 

- 원호형의 결혼을 축하하며

 

오랜 얘기처럼 되살아나는

우리들의 거리

혹은 짓밟히고

혹은 스러져 가고

또 혹은 삭제되어버린

우마담, 우마담의 땅콩껍질

이 빠진 방울뱀이여

암굴암에서 순수는 넘치고 있었고

수원지에서 우리의 죽음은 청산가리로 풀리기도 했지만

월산동 고갯마루에서 누문동에서 세븐클럽에서

저당잡힌 시계, 시계와 녹음기 속에

막걸리처럼 텁텁하게 우리네 사랑은

걸어가고

찢어버린 詩畵 너머로

힘차게 몰려오는 우리의 언어가

베아트리체를 만나

다시 눈 뜨고 있소

그 작은 체구가 모래를 퍼 올리고 바위를 굴리는

휴전선 근방에도

나주 하숙방 벽지 위에도

토해내지 못한 유운(流雲)의 얘기들이

낙수 근방 흐르는 물이 송광사에 이슬 되어 맺히듯

폭우 되어 쏟아 지오

풋과일 같은 우리의 인간재판은

이제 여인숙에 머물지 않아도 되오

얼어터진 가슴으로 울지 않아도 되오

더한 눈물과 분노와 피와 사랑이

하늘을 열고

새로 돋은 방울뱀의 이빨로

만나는 모든 것들을 물어뜯어

그대의 꽃이게 하오

그대의 사랑이게 하오

하여

천지사방은 그대의 눈물겨운 독기로 충만하오. (1980. 11)

 


휴대용 인간

 

등이 휘도록 어둠을 짊어지고

곧게 걸어 이르른 빈 들

허튼 고함소리만 허공을 헤매고

원귀들만 가슴을 쥐어 뜯는다

누굴 위해서 무얼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고 사랑받는 스스로를 기다려

목욕제계하고 동사(凍死)해버린 거리에서

따라 나서는 돌멩이 하나 건져 올려

부지런히 쏘아 올리지만

어디쯤일까

죄도 없이 쓰러지는 나무들 묻히다가

불이 되는 광장은

 

모른다

그저 표준규격 제품으로만 사는

깡통 속의 내 아이들

누군가에게 저당 잡혀버린 목숨

그 가슴으로, 눈으로

눈물을

하늘을

보았을 리 없다. (1981. 1)

 


배고픈 다리 근처

 

변두리에서 구르는 모가지들

고운 꿈을 리어카에 싣고 다닐런지 모르지만

항상 시리고 배고픈 겨울나무들은

목이 마르고

사랑하는 사람아 나는

얼어붙은 듯 포도에서 울먹이고 있구나

충장로는 여전히 남의 땅이고

배고픈 다리 아래 내 집 앞에는

휭 찬바람만 불어대는데

웃음소리 한웅큼보다 힘없는

우리의 자유와 정의와 분노

구름 낀 하늘을 증오하거나

비 내리는 하늘을 기다린다 하더라도

말없는 애비는

해어름 지친 다리를 끌고 있구나

 

사람들은 다방에서 거리에서

말이 많지만

내놓을 것 없는 우리는

어디로 흐르고 있는지

어디에서 배고픈 너흴 기다리는지

찢어진 창호지 사이로

병든 에미의 한숨이 새어 나온다

아등바등

목구멍뿐인 모가지 모가지가

더는 피 흘리지 않고

더는 눈물 흘리지 않고

곧바로 썩어가게 하지 못하면

우리 사랑은 어디쯤에서

섧다 지친 그 얘길 나눌 수 있을 것이냐

가자, 차라리 누운 꽃잎처럼

웃음이나 흩뿌리며 가자. (1981. 2)

 


할미의 축원

 

아가, 너는

말 배우지 마라

이것 저것 널려서 서로 제 자랑만 하는

잘난 사내 잘난 계집

이것도 저것도 없어서 서로 아귀다툼 악다구니의

못난 사내 못난 계집

지옥이 예 아니냐

잘난 것들은 못난 것들의

못난 것들은 못난 것들의

피나 빠는 예 지옥에는 너무

말이 많구나

벙어리로 너는 밭 갈고 나락 거둬라

절대로 절대로 이 땅의 말 배우지 마라

 

아가, 너는

눈뜨지 마라

에미 뱃속 그 어둠만 어루만지거라

떠도 어둠, 감아도 어둠, 아니

세상에는 빛이란 게 있기도 하는 모양이더라

보고도 못보는 빛

못보고도 보는 빛

억지로 보는 빛

아가, 너는 무얼 빛이라 하겠느냐

나는 간혹 세상이 우는 소리나 들으며 잠이 든다

추적추적 비 내리는 밤에

아가, 너는 무얼 보려느냐

이른 새벽부터 나는

도끼에 찍혀 넘어지기만 하는 나무나 보고

뿌리까지 파가는 삽이나 본다

눈 뜨지 마라 아가, 너는

 

비나이다 비나이다 삼신령께 비나이다

하늘같은 우리 애기

귀머거리 되게 합시사

저 먹을 것만 타고 나서 때 되면 죽는

그런 복만 타고 나게 합시사

 

아, 어쩔거나 아가

하늘같은 우리 아가. (1982. 2)

 


후들후들 다리는 떨리고

 

기다리지 않아도 온다던 봄

어디쯤 허름한 여인숙에 머물고 있는지

계집의 사타구니 근처를 헤매다 일어 난

3·1절 날 아침

바튼 기침소리만 떠돌고

예의바른 사람들은 머릴 빗고 거울을 보는데

일어 나 세수나 할까

간밤 천정에서 싸우던 쥐들이나 찾아볼까

그새 많이도 성가신 사람이 되어

돌아갈 곳이 없다

 

아야, 너는 무얼 기다리느냐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욕이나 하면서

내일은 또 배고픈 다리 아래로 기어들어

무얼 보고하려느냐

보게 되리라

소문만 무성하던 오늘도

울긋불긋한 아치 밑으로 승용차만 바쁘고

소주 한 모금에 취한 사내들

눈치만 본다 눈치만 본다

후들후들 다리는 떨리고. (1981. 3)

 


넝마들의 사랑법

 

서울 어둡고 습기 찬 지하실 셋방에서

마시지도 못하는 깡소주를 마셔가며

월수 10만원으로 다섯 식구 목구멍을 지키다

중동에나 가야겠다던 아우야

고장 난 텔레비젼에서도 피서인파 백만은 우글거리고

쇠고기 값 연동제, 커피 값 자유화, 해외여행 자유화, 또 무엇

연일 신문은 바빠도

구멍 난 런닝샤쓰 속에선 땀띠들만 쏘아대고

꽁보리밥에 맹물만 마시고 깜깜한 방안 서성이다가

누렇게 뜬 얼굴 맞부비며 웃고 있구나, 아우야

 

더듬거리며 우리가 걸어 온 언덕길에는

정직한 가난이 푸석거리고

성한 데 없는 조상들의 무덤

유난히 억센 들풀만 무성히

꿈꿀 시간도 없는 우릴 기다린다

이 길로 애비의 주검은 거적에 덮여 넘어 가고

삐비꽃 하얗게 미쳐버린 에미는

밤새 피를 팔았다

 

가자, 통금뿐인 거리로 가자

대웅전 어둠 속에서 금이빨 드러내고 치고 박는 佛도깨비

십자가 높은 곳에서 나는 찾았네 나 몰라라 洋도깨비

우리들 헤진 저고리라도 던져주고

책 속에 갇힌 길을 레코드로얄 타고 가는 낮도깨비

우리들 낡은 짚새기라도 던져주고

멀쩡한 육신 이리 막고 저리 막는 염라대왕 복지귀신

우리들 아랫도리 내어주고 내어주고

철조망뿐인 거리로 가자

피투성이 알몸 부벼 지피는 불로

겹겹 둘러 친 벽돌담 철대문 넘어

굳어버린 심장 한가운데를 찍어 내리고

울어 보자

우리는 이렇게 사랑하나니, 욕심없이 사랑하나니. (1981. 8)

 


문패 달기

 

손쉽게 용서할 줄 아는 아내여

그대를 쪽바리에게 팔고 돌아 온 날 저녁도

밥상은 아랫목에 놓여 있었다.

자정이 넘은 밤하늘로 진양조 목울음이 스러지고

버리고 떠난 길을

손을 흔들며 돌아오는 내 손엔

쵸코맅 냄새가 가득하고

지전이 부스럭거렸다

쓸 데 없이 기다리다 지친 아이들 곁에서 오늘도

해묵은 꿈이나 다시 꾸어 보며

네 탓도 내 탓도 아닌 헤진 옷을 꿰매는

사랑하는 사람아

떠나야 할 때 떠나지 못하고

싸워야 할 때 싸우지 않는 사내

예배당에 꿇어 앉아 가슴을 치면서

누굴 사랑하는지

광대뼈만 불거진 아이들의 누런 얼굴이

이빨을 앙당 물고 고갤 돌리면

이름도 없는 문패 하나 거머쥐고

헤프게 웃고 있다

이웃집 드높은 담장 위에서 도둑고양이 울고 가고

칭얼대는 아이의 곰발 위에 된장을 발라 주면

그대가 버티는 이 땅의 어둠은 짙어

어디에나 갇혀 있는 사람들

말없이 젓가락 장단을 맞추고 있는데

횃불을 켜고 있는데. (1981. 10)

 


이별가

 

철조망에 얼굴을 짓찢기우면서도

동물원 울 하나 채우지도 넘지도 못하는 우리들의 울부짖음

춥고 가난한 얼굴을 맞부비며

겨울밤을 지키고

보내야 할 너를 부둥켜안고 있구나

 

2호 법정 주위에 내리던 비가

광주천변 포장마차 위에 눈발로 흩날리면

끝없이 넘어지고 미끄러지는 고갯마루까지

그믐밤을 맨 발로 걸어가야

문 열고 나오는 빛으로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건너뛰는 연습을 곤백번도 더 하고

너를 들쳐 업는다

서리 맞은 아이들 모여

닭발같은 손가락으로 돌을 날라

진창길에 징검다리 만들고 다시 시들면

피눈물 흘리면서 하나씩 건너뛰어도

도시는 붉은 신호등 아래 멈춰 서서

멀쩡한 안경알만 닦고 있고

꼬마들은 신나게 팝송을 불어댄다

 

우리를 홰쳐 먹던 사내들

오늘도 술안주가 부족하고

아물 수 없는 내 얼굴의 상처

몇 바늘을 더 꿰매어도 얼어터지기만 한다

사랑하는 사람아 떠나지 마라

더러는 우리 함께 동요를 부르며

환히 웃을 일도 남아 있거니

언 손 호호 불며 통금 가까운 거리를 건너자

여전히 우리들의 심판은 연기되고 있어도, 사랑하는 사람아

나는 너를, 너는 나를 껴안고

텅 빈 들판을 곧바로 걸어가자.

 

나는 너를 보낼 수가 없구나, 너를. (198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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